2024.04.10 - [잡소리] - [중종실록] 겨울에 어린아이가 발이 잘린 채 버려져 있었다 3
11. 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2월 29일 임인 2번째 기사 - 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 발이 잘린 아이의 일을 전교하다 >
판의금부사 김금사(金謹思) 등이 아뢰기를,
"어린아이의 발을 자른 사건은 의심스러우므로 한덕(漢德)을 형추(刑推)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일로 본부에 하문하셨습니다. 처음에 옥가이(玉加伊)를 추문했을 때, 옥가이가 ‘한덕이 내 발을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발을 자를 때의 상황까지도 매우 분명히 밝혔으므로 믿을 만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발을 잘렸다고 말한 뒤에 여러 차례 다른 집을 거쳤는데도 그때까지 두 발이 모두 온전했습니다. 마침내 귀덕의 집에 와서는 치료를 잘하지 못하여 발목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가서 보게 하니 발을 자른 것이 명백하다고 하므로 귀덕을 여러 차례 매질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물금(劉勿金)의 동상으로 빠진 발을 살펴보니 역시 잘라서 끊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래 이같이 동상으로 발이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더구나 옥가이 같은 어린아이의 발이야 동상으로 빠지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귀덕의 집에 있을 때도 두 발이 탈이 없었으므로 한덕을 석방해야 하는 일에 의심할 것이 없으나, 옥가이의 말이 이와 같았으므로 아직 석방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의 말로 한덕을 추문하는 일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가령 그 발이 동상에 걸려 귀덕의 집에서 빠졌다 해도 치료하지 못해서 발이 빠지게 되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제 형추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결죄(決罪)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조서(調書)를 작성해야 합니까. 의원의 말에만 의거하여 귀덕을 계속 심문하는 것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도 한덕을 형추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한덕의 집에서 버려진 뒤에 여러 번이나 남의 집을 거치다가 발이 빠졌으니 한덕이 관계되지 않은 것을 나도 아는 바다. 그러나 유물금의 동상으로 빠진 발과 비교하여 보면, 동상으로 빠졌는지 잘린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물금의 발이 오래되어 분변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 보니 동상으로 발이 빠졌다면 정강이 뼈가 끊어진 것과 같이 생긴 것은 왜 그런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옥가이가 한덕이 발을 잘랐다고 범범하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솜으로 입을 막은 상황까지도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비록 아이라 하나 나이가 4∼5세가 넘었는데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여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무슨 원한이 있어서 거짓으로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그 아이가 다른 집에 가고 나서 한덕이 쫓아가 몰래 자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의원은 모두 잘라서 끊어진 것이라고 말하므로 귀덕 역시 추문한 것이다. 유사(有司)하고만 의논해서는 안 되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의정부의 낭관을 불러 이 옥사에 대해 의논을 모아가지고 오도록 하라."
⇒ 의금부에서 말하길,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주장하지만, 한덕이 아이를 버린 이후로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주워져 여러 집들을 전전했을 때는 발이 멀쩡했고, 귀덕을 추문하면 자신이 발을 자른 것이 아니고 동상 때문에 발이 빠진 것이라 주장하며, 실제로 발이 빠진 것과 칼로 자른 것이 비슷한 사례도 있어서 누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어린아이의 말만 믿고 더 이상 추문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아뢰자 중종은 이에, 의원들이 옥가이의 발은 칼에 의해 잘린 것이라 증언하였고, 아이가 무슨 원한이 있어 거짓을 고하며, 한덕이 버린 이후에 몰래 아이의 발을 잘랐을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라 명하였다.
12. 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2월 30일 계묘 1번째 기사 - 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 발이 잘린 아이의 일을 전교하다 >
영의정 정광필이 의논드리기를,
"옥가이(玉加伊)가 말한 것을 보면 발을 자른 것은 한덕이 한 짓 같습니다. 그러나 한덕의 집에서 나와 서너 집을 거치다가 끝에 귀덕의 집에 이르게 되었는데 두 발이 그때까지 있었고 단지 동상에만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귀덕이 역시 분명하게 말하기를 자기 집에 이른 후에 두 발이 떨어졌다고 하고,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자도 있으니, 한덕(漢德)이 잘랐다는 것도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신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는 끝까지 밝혀 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장순손은 의논드리기를,
"신도 이 사건을 들었습니다. 신의 뜻에는 금부의 아룀이 온당하게 여겨집니다."
하고, 우의정 한효원은 의논드리기를,
"옥가이의 말로 살펴보면 입을 막고 발을 잘랐음이 지극히 분명하여 4∼5세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능히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형추하여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그러나 귀덕과 돈독(敦篤) 등 여러 사람의 초사를 보면,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으므로 동상이 걸린 것도 또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무고하게 죽을 폐단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이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모두 이 사건을 계속 조사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부당하다고 중종에게 결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3. 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2월 30일 계묘 2번째 기사 - 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 정원에 발이 잘린 아이의 일을 전교하다 >
정원에 전교하였다.
"귀덕의 공사는 근거가 없으니 추문하지 말라."
⇒ 귀덕에게 의심되는 점이 없으니 더 이상 추문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누가 어린아이의 발을 잘랐는지 결국 밝혀지지는 않았다. 중종이 2주간 직접 사건을 보고받고 의욕적으로 사건을 밝혀내려 하였으나 증인과 증거가 불확실하고 서로의 증언도 맞지 않아 결국 신하들의 반발로 급히 사건을 종결하고 말았다. 사건에 개입된 인물들이 노비, 무녀와 같은 천민이고 피해자가 어린 천민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직접 사건에 개입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던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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